도나 해러웨이(다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을 배웠다.
해러웨이는 학부에서 동물학, 철학, 문학 전공을 하고, 석사 때 진화철학과 신학을 연구하고, 박사는 생물학으로 학위를 받았다.
“주로 SF 서사물의 기계-인간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되던 ‘사이보그’라는 단어를, 해러웨이는 “포스트휴먼적 존재 및 사유에 대한 ‘은유’로 사용”했다.
수업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 급진적 페미니즘, 사이보그 페미니즘을 구분해서 설명했다.
수업을 듣고 나서 책 《해러웨이 선언문》(황희선 옮김)을 사서 훑어봤다. 역자가 생물학과 문화인류학을 공부했다.
한 줄을 읽을 때마다 배경 지식을 필요로 하는 내용이 쏟아져 나와서, 생물학이나 철학, 페미니즘을 연구하지 않은 사람이 한 번 읽고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따라서 내가 제대로 논할 수는 없지만, 받은 느낌이라도 적어 본다.
수업에서는 포스트휴먼과 연관 지어 소개했지만, 내가 보기에 사이보그 선언은 기본적으로 페미니즘에 관한 것이다.
캐리 울프와의 대담에서 사이보그 선언을 쓰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레이건 정부 초기에 (그때가 80년대 초반이었죠) 《사회주의 리뷰》의 웨스트 코스트 콜렉티브가 저를 포함해 여러 맥락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로 간주되는 사람들 -- 상당히 광범위한 뜻을 함축하던 정치 구성체입니다 -- 에게 원고를 청탁했어요. 나중에 레이건-대처 시대로 기억하게 된 당시의 역사적 순간에, 무엇이 가능하고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글을 몇 페이지 써달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60년대가 정말로 끝났다는 사실을 모를 수 없었고, 더 큰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정치와 상상력에 대해 품고 있던 거대한 희망을 잃지 않으려면 운동 내부에서 발생한 심각한 문제들을 정말로 손봐야 할 시점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사이보그 선언〉은 이런 제안을 받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 해러웨이는 기존의 사회주의 페미니즘(socialist-feminism)과 급진적(radical) 페미니즘의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사이보그’ 개념을 자기 식대로 재해석해 비유적으로 끌어들였을 뿐이다. 나중에는 소재를 사이보그에서 반려견으로 바꿔서 〈반려종 선언〉을 썼다.
또한 ‘포스트휴머니즘’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포스트휴머니즘이라는 용어는 좋아한 적이 없어요. 우리가 볼 때 포스트휴먼은 불합리하죠.
그러니까 구호가 필요하다면 이런 게 있겠죠. “포스트휴머니즘이 아니라 퇴비다!” “끝내주는 퇴비를 만들자!” (베스 스티븐스와 애니 스프링클의 표현입니다.)
해러웨이의 이러한 입장을 보건대, 포스트휴먼을 연구하고 논의하는 입장에서 해러웨이의 선언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는 의문이다.
사이보그가 등장하므로 포스트휴먼과의 관련성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은유일 뿐인 ‘사이보그’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확대해석하는 것은,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쳐다보는 것과 같은 잘못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사이보그 선언은 포스트휴머니즘보다는 페미니즘에 관한 논의에서 다루는 것이 타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중에 과제를 하다 보니, 포스트휴머니즘의 세 입장 중 하나가 페미니즘이라고 교안에 이미 나와 있다.)
이 수업을 수강하면서 낚였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강의 제목에는 ‘포스트휴먼’이라는 단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강의계획서에는 ‘포스트휴먼’과 ‘포스트휴머니즘’이 여러 차례 등장하기는 한다. 때로는 그와 반대로, 포스트휴머니즘과 별로 상관 없는 작품까지 굳이 끌어들인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주차에서 사이보그 선언을 배우고는 이중으로 낚였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인문학을 제목으로 내건 포스트휴머니즘 강의를 표방한 페미니즘 수업이었다’라는 얘기다. (하지만 페미니즘이 바로 포스트휴머니즘의 입장 중 하나라고 하니, 내가 오해한 것일 수 있겠다.)
어쨌든 나의 척박한 인문학적 토양에 단비와 양분을 뿌려준 고마운 수업이다.
내친 김에 기말 과제까지 써서 제출했다.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든 글을 쓰긴 했다.